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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전문가가 본 평양 도시계획
글쓴이 : 평화재…     날짜 : 09-11-13 13:41     조회 : 4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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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한 평양은 지난 50여 년간 완전히 새롭게 건설된 사회주의 계획도시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이들이 하나의 전형으로 극찬하곤 한다는 평양 풍경을 10월 9∼11일 평양을 다녀온 건축전문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사회주의적이자 민족주의적 건축양식이 특색
 
30∼40층 아파트가 즐비한 거리임에도 러시아워의 교통체증이 없고, 녹음이 우거진 도심과 거리에는 무공해 전차가 다니며, 언제든 강가를 거닐 수 있다. 우중충한 회색빛 고층 아파트가 경관을 주도하며, 뻥 뚫린 거리에는 차와 인적이 드물고, 아직도 전차가 도시의 주 교통수단인 도시가 있다.

둘 다 평양을 묘사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의 평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본원리에 충실, 부분보다 전체 구성 중요시

필자가 북의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6·25를 전후한 건축과 건축계의 변화〉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문헌을 통해 북녘의 건축을 들여다보면서도 언제쯤 그 현장을 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6·15정상회담 이후, 평양의 모습이 TV에 자주 비쳐지면서 남측의 많은 사람들이 TV에 비쳐진 평양의 도시와 건축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해했다. 때문에 필자에게 이러저러한 기회에 평양의 건축을 이야기할 기회가 심심찮게 주어졌고, 평양의 도시와 건축에 대해 마치 여러 번 방문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평양의 도시건축을 마치 눈으로 보고 온 것처럼 자세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평양 방문이 필자와 같은 연구자에게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후 하루라도 빨리 평양의 도시와 건축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접었을 즈음에 그 현장을 볼 기회가 생겼다. 방문목적은 ‘건축탐방’이 아닌 ‘아리랑 공연 참관’이었지만, 필자에게는 아리랑 공연보다 평양의 도시와 건축이 주된 관심사였다.

처음 평양을 방문하는 필자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과연 문헌을 통해 이해했던 평양과 실제 평양 사이에 차이와 간극이 어떠할 지와 그 차이가 필자가 지금까지 일반인과 전문가를 상대로 이야기해왔던 ‘평양의 도시와 건축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비행기는 북녘 땅으로 들어섰다.

착륙 전 비행기에서 펼쳐진 북녘 땅은 한가로워 보였다. 눈 아래 펼쳐진 마을에선 북에서 문화주택이라 불리는 연립주택이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협동농장으로 운영되는 농촌 마을의 풍경은 단독주택으로 구성된 남측의 농촌 마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눈길을 끈 것은 농가 앞의 푸른 마당이었는데, 이는 최근 경제조치로 장려된 텃밭인 듯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이미 익숙해진 평양순안공항을 통해 평양에 발을 디뎠다. 공항 건물 전면에 걸려있는 그림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예술과의 첫 대면이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9·9절 도로변 풍경은 가을걷이가 마무리된 여느 농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물은 금수산기념궁전이었다. 도로 끝에 위치하여 터미널 비스타(terminal vista)를 형성하는 기념궁전은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기본원리에 충실한 평양의 도시계획을 잘 보여준다. 이어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를 지나 시내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카메라로 담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도 생경하지만은 않은 풍경들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량이 적절한 속도를 유지한 데다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지 않아 거리 풍경이 어지럽게 펼쳐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시경관 구성에서 사사로운 이익이 개입되지 않고, 부분보다는 전체 구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결과일 것이다. 덕분에 사진으로만 보았던 주요 건물들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숙소인 양각도국제호텔로 가는 길에 펼쳐진 잘 닦인 도로와 녹지 그리고 각종 문화시설과 고층아파트의 도시 풍경은 공원도시 조성을 통해 산업혁명기에 태동했던 자본주의 대도시의 피폐했던 도시환경을 개선함과 동시에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민족건축 양식 시도 눈에 띄어

대부분의 건물은 하나하나 살펴보면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현대의 건축기술과 건축디자인의 결과물이지만 이들을 조합해 도시를 만드는 방법에서 사회주의 도시계획은 자본주의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고, 그 결과 그것들이 연출해내는 도시풍경 역시 달랐다.

넓은 도로 양편의 고층건물은 대부분 고층 아파트였고, 가로변 저층부분의 상업시설과 고층 건물 사이 곳곳에는 문화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 인민문화궁전과 평양대극장이었다. 자동차로 지나치면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전통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들 건물은 평양의 현대도시 풍경에서도 눈에 가장 잘 띄었다.

승리거리 남측 끝에 위치한 평양대극장은 전통건축의 모습을 갖춘 문화시설로 민족건축양식의 초기 건물이다. 평양에는 평양대극장 이외에 옥류관과 인민문화궁전 및 인민대학습당 등 시민들이 이용하는 많은 시설들이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일행 중 국악을 전공하시는 선생님의 “우리는 왜? 저런 건물을 짓지 못하느냐!”는 역정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는 건축가가 전통건축을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움은 콘크리트 한옥으로 공공시설을 설계해야했던 한 건축가가 디자인을 통해 전통건축의 미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보다 준공 후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일본색이나 중국건축 냄새가 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북측에서는 1960년대부터 민족건축형식에 대한 실험이 시도되었고, 평양대극장은 그러한 시도의 초기작업이었으며, 인민문화궁전은 완성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내 곳곳을 다녀볼 수 없었지만 48층 높이의 양각도호텔 전망대에서 평양 시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위로가 되었다. 도시로서 평양과 서울을 비교하면 공통점 못지않게 그 차이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평양의 스카이라인이 사무소건축이 아닌 공동주택이 좌우되고 있다는 점, 서울의 녹지 대부분이 서울을 둘러싼 도심 외곽의 산에 의한 것인데 비해 평양의 녹지는 건물사이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고 시가지와 강과의 관계도 다르고, 거리에서 골목을 볼 수 없다는 점 등은 평양의 두드러지는 특징들이다.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긴 것일까?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좌우하는 건물군의 종류가 다른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시스템 차이에 기인한다. 평양 뿐 아니라 최근 급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상해 등 대도시의 일부 지역을 빼고는 스카이라인은 공동주택이 좌우한다. 이는 경쟁적 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에서는 주택에 대한 수요가 사무소건축에 비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도시의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그 흔한 골목을 평양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직접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엔가 골목이 남아있을지도, 어쩌면 도시 한구석에 골목이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골목이란 작은 단위의 건물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데, 지난 전쟁으로 인해 역사도시의 흔적이 사라졌고, 전후 평양의 대규모 복구과정에서 골목이 사라진 것이다. 평양에서 골목의 소멸은 전쟁의 상흔과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골목의 소멸에 담긴 역사

평양에서 대동강변의 풍경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대동강가에는 둑이 없거나 야트막한 둔덕이 위치하여 강변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홍수예방을 위한 제방과 그 위로 8차선도로가 위치한 서울의 한강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일정상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대동강변에 위치한 옥류관과 대동강의 관계도 한강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이어서 주체사상탑 공원에서 바라보는 옥류관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대동강변의 이러한 풍경은 기본적으로 평양과 서울의 역사적 형성과정의 차이에 기인한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 역사도시인 평양과 서울의 현재 모습은 대동강과 한강을 끼고 양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어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도시형성의 역사에서 본다면 두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평양은 대동강에 면해 세워진 도시로 항상 대동강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지만, 서울은 청계천을 품에 안고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강은 도성으로부터 10리 넘게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강의 수해로부터 덜 민감했고, 홍수대책도 제방으로 쉽게 해결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두 도시에서 강과 시가지의 접근성 차이를 낳았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의 방문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궁금했던 모든 것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북측은 제한된 시간 내에서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었고, 필자는 볼 수 있는 것만 보았고 그 안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본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행히(?)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초 우려했던, 문헌으로 이해했던 평양과 직접 체험한 평양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오히려 두고두고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평양의 도시·건축의 이해의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소개

안창모(44) 교수는 건축사를 전공했고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교수로 있다. 통일문화학회 회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북한(평양)의 도시풍경〉 〈조형문화예술부문 남북교류 프로그램 연구〉 등 남북 문화교류와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 [58호, 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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